박광열 발칸반도 인솔자님을 칭찬합니다.
‘여행은 기록 없이도 잘 짜여진 이야기’란 글귀를 읽을 때마다, 평범한 일상도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루의 짜임새를 위한 노력으로 그날의 태양이 늘 다르게 느껴지듯이, 여행에서 ‘동반자’가 일깨우는 새로움은 사랑스러움 그 이상입니다.
낯선 곳에선 익숙한 것을 발견할 수 없어, 하루가 새롭고 기대되는 날들, 살면서 가슴 설렌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길 위의 가장 큰 행복은, 하루가 끝나고 전날보다 더 나아진 자신을 발견할 때, 내가 가는 길이 나를 더 슬기롭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늘 지니고 걸어갑니다.
‘참좋은여행사’, 8월26일부터 9월7일까지 ‘발칸9개국(슬로베니아,보스니아,크로아티아,몬테네그로,알바니아,북마케도니아,세르비아,불가리아,루마니아) 12박13일’의 여정에서, ‘박광열’ 팀장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여행의 해후,특정 지역, 방문하는 장소의 문화, 관습, 역사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제공, 여행자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비상상황 발생시 적절한 조치방법도 귀띔해주었지요. 이는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도와주는, 명소를 안내하는 것 이상의 역할, 우리들에게 현지의 진정한 매력을 전달, 명쾌한 지식, ‘군계일학’의 도도함도 빛나 보일 정도였습니다.
서른 명이 훨 넘는 가족들, 선택된 ‘학교’(?)에도 등교시키느라, 불철주야 집안 가장역할 톡톡히, 그래서안전한 여행환경에 보호받는다는 평화로움,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현지 언어에 익숙지 않은 여행자들을 위해 통역 서비스도 제공하여, 원활한 의사소통,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게다가 한국인 해설자 등장은 ‘금상첨화’였다고나.?
무엇보다 ‘박광열’ 팀장님은, 항상 친절하고 긍정적인 태도로 여행자들을 상대해 주었습니다. 사전에 충분히 소통하는 자세, 여행자의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는 태도, 날씨 변화, 교통, 건강 문제 등 예기치 않은 상황에 대비하는 모습이란, 한결 소중하고 편안한 여행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답니다. 오랜 장거리 버스이동, 클래식 명곡의 선율은 아직도 귓바퀴를 감쳐돌고 있네요.♬♥
박광열 팀장님은 한 단체의 '보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윽한 미소와 말씨로 모든 일행들을 한결같이 대해주려는 눈길, 한 순간이라도 부족함을 느끼지않게 해주려는 따뜻한 배려와 노력, 이 모든 것이, 빼어난 인솔자임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가야할 길도 아름답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것 또한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군요. 팀장님 고생하셨습니다. 푸욱 쉬시며 국내의 여유를 더 즐기시다가 다음 여정에 편안히 오르시길 기원합니다.
2024년 8월26일~9월7일 12박13일간 강릉 초당동 부부, 다시 한번 팀장님께 고마웠던 마음을 전합니다. 건강하시고 지금의 ‘발칸반도’, 우뚝 솟은 ‘산’의 정기처럼, 호연지기, 소속 회사와 더불어 일취월장, 빛나는 발전을 기원합니다. 고마웠습니다. 더불어 함께 즐거워했던 일행 분들도 언제나 건강히 지내시고, 뜻하신 일들이 올해에도 두루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강릉시 초당동에서 발칸반도까지
김현진 정완철 부부 드립니다.
★★★ '박광열 팀징'님과 함쎄 한 "참 졸은 여행"이었다. 발칸반도 12박 13일, 다시 꿈꾸며 ★★★
♣ 인천출발 ♧ 루블랴나 ♧ 블래드 ♧ 포스토이나 ♧ 크르카 ♧ 스플리트 ♧ 메주고리예 ♧ 모스타르 ♧ 두브로브니크 ♧ 코토르 ♧ 티라나 ♧ 오흐리드 ♧ 스코페 ♧ 베오그라드 ♧ 소피아 ♧ 벨리코토루노보 ♧ 시나이아 ♧ 브란 ♧ 시기쇼아라 ♧ 부카레스트 ♧ 인천도착 ♣
2024년 8월27일(화), 올해의 여름, 연일 열대야 무더위, 보금자리를 탈출하는 심정, 발칸반도의 9개국, 기대감은 선풍기 역할오 충분했다
아침 10시45분경 강릉 집을 나왔다. 강릉역 KTX 11시33분 열차를 예약, 한여름이 지나가고 있지만, 연이은 전국열대야 기승, 아직도 피서객이 붐빈다. 그래서 미리미리, 타는 열차와 죄석을 확보해 놓았었다. 요즘 강릉의 피서객들이 실속파로 보인다. 성수기를 피해 여유있게 백사장과 푸른바다, 더위를 식히고 즐기려는 알뜰살뜰 가족들,^^ 말복이 지나면 아침저녁 서늘함을 누렸었는데, 귀국전이나 지금이나 그야말로 '이열치열'이다.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무엇을 가져갈까, 나는 가져가고 싶은 의상, 여행용 물품, 응급의약 등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아내와 의견을 주고받았다. 수량은 적게, 크기는 작으면서도 가벼운 것, 쓰임새가 가장 높은 순, 차례로 , 배낭을 채웠다. 저 가방 속에는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 무엇보다 발칸반도는 지금 여름이니까, 다른 여행 때보다 선택문항은 손쉽게 고를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의 호기심 제 일호는 기내식이다. 언제 어디를 가든 우리는 서로 다른 음식을 부탁, 그리고 교대로 맛보는 것, 여행의 별미와 재미를 제공받는다. 음식을 앞에 둔 풍요로움^^도란도란 두런두런, 소중한 식사 시간^^강릉 안목 카페거리, 소박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카페가 많다. 그런 곳에 둘이 앉아 바다를 끼고, 눈을 맞추며, 아내가 주로 얘기하고 나는 많이많이 들으면서, 나를 더욱 깨우쳐가고 있다.
이번 여행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북마테도니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볼리비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등 9 개의 나라를 방문한다.
2024년 8월27일(화), '슬로베니아의 수도이며 숨은 보석, 블로랴나' 공항 도착, '작은 프라하'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다
'루블랴나'는 오스트리아, 항가리 제국의 영향을 받아 전형적인 동유럽의 느낌, 아기자기하고 난잡하지 않은 단아한 아름다움, 발칸 유럽의 핵심 도시다. 옛 유고연방 시절 가장 먼저 자유민주주의 선거를 실시하여 동구권의 개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귀국 항공편에 오를 때까지, 신중하고 특별한 재능기부, 운전기술이 그야말로 능숙한 '바타'(내가 들은 바로는)운전기사와 함께헸던 47인승, 듬직하고 늠름한 버스다.
'슬로베니아'는 지리적 여건상,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건물과 문화재 등이 크게 파손되지 않고 남아있어 동유럽 여행의 숨은 보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촬영지로도 알려진 '류블랴나'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인 이곳은 6~8월의 평균 날씨가, 13도에서 최고 27도를 넘지않아,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는 여행지다. 유럽 소도시의 정취가 묻어나는 아기자기한 매력과 동시에 친환경적인 도시로도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루블랴나' 지명의 어원에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 슬로베니아어로 ''사랑스러운'이란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인자하고 부드러워 보인다. 내 느낌엔 사랑스러운 체형들이다.^o^ 유럽의 전형적인 붉은색 지붕이 있는 중세시대 건물 사이로,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분홍색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성 프란체스코 성당이다.
'루블랴나' 근교 블레드 호수, '슬로베니아'의 가장 유명한, '호수 휴양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눈이 닿는 곳 어디 하나, '그냥 그런 곳'이 없다. '루블랴나'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이 호수는 빙하기 녹은 물이란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끊임없이/열 마리씩/스무 마리씩/신선한 물고기가/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가장 신나게 시퍼런/파도의 칼날 하나를/집어들었다."(전봉건, 피아노) 피아노의 선율이 생생한 물고기로 튀어오르는 것처럼 귀를 매료시키듯, 시퍼런 호수의 싱싱한 저 물고기, 퍼득거리는 장면과 소리가 일치한다. 공감각적 이미지가 춤을 춭다. 물이 있는 관광지는 예쁠 수밖에 없다.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섬에는 '성모 마리아 승천 성당'이 있다. 객관적으로도 진짜 예쁘다. '와아~' 감탄사가 이렇게 청정하게 들릴 수가.!! 뱃사공이 노를 젓는 나룻배를 타고 계단을 성스러이 올랐다. 결혼식을 마친 신부가 신랑을 업고 이 99개의 계단을 오른다고.^^
'블레드 성'에서 바라보는 호수와 마을은, 구름이 약간 있지만, 맑은 하늘이 더 잘 만들어내는 예술 작품이다. 호수와 자연은 각각 물에 나뭇잎을 차례로 적시며 내 눈과 가슴과 마음에 마구 수채화 붓칠을 멈추지 않는다. 아내와 나는 저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을 꿈꾸었다. ^^
우리 사회에서 여행이 크게 주목 받은 것은,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정책이 도입된 직후였다. 빠른 경제성장이 그 원동력이다. 이젠 '여행산업'이라고까지 일컬어진다. 요컨대 '포스트모던 투어리즘'은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여행을 예외적 삶의 시간이라기보다 일상적인 삶의 영역으로 자리잡게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한 일과 여가를 누리기 위한 여행이 어느새 삶의 두 기둥을 이루는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부부여행은 소통과 협력이 중요하다. 저런 나룻배나 돛단배, 힘든 경우엔 동력을 잏은 배에까지 비유를 할 수 있다. 여행 중에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적절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여행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고 상황에 잘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다. 부부가 서로를 더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부부여행의 큰 매력 중 하나다. 젊어서는 날 선 날도 많았지만, 점점 지날수록 나에게 했던 충고가 모두 옳았다는 것도 깨달아가고 있다. 누가 뭐라든 어떻게 생각하든, 나에겐 나만의 내 인생이 있으니까.^^
2024년 8월28일(수), '세자나' 호텔'PRUNK'의 아침, 유럽최대 석회동굴이 있는 '포스토이나', '바다오르간'이 오라는 손짓 '자다르'로
아침 8시15분(현지시간)에 '포스토이나', 유럽 최대의 석회동굴로 약 1시간 정도 이동했다. 희귀한 종유석이 장관이고, 일부 구간은 '꼬마기차' 탑승 관람했다. 이 동굴은 길이가 20km라고 한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카르스트(석회암)' 동굴이다. '아이스크림'이라 명명 받은 종유석, 사진을 찍어 '손전화기(핸드폰)'에 담이, 밖으로 나왔는데, 이 수직 종유석은 금방 녹아서 누워버렸다.^o^
동굴 안에는 역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동굴 속 도룡뇽인 '올름(Olm)'이 살고 있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신비로운 생물이다. 10 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으며, 피부가 투명하다. 어두운 동굴에만 살아서 눈이 퇴화, 앞을 볼 수가 없다. 약 1억 년 전 지구에 존재, 생명은 약 백 년 정도라고 한다.
가장 아름다운 푸른 아드리아해를 볼 수 있는 곳, '크로아티아'의 대표적인 해변 휴양도시 '자다르'로 가느라 국경을 지난다. 여권검사가 없고, 운전하시는 기사님과 팀장님이 알아서 처척이다. 국경지대 탑승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 절차를 통헤 소지품이나 신변을 확인 받는다. 엄격한 검색대의 눈앞에서는 괜스리 착한 표정을 짓게 된다. 경계지역이나 공항터미널 탑승구, 언제나 이 모든 과정을 무사히 통과해 다른 땅에 도착했을 때, 나는 죄없는 사람이며 도덕적이고 깨끗한, 참된 신분의 사람으로 다시금 인정받는 기분이다. 그럴수록 이 나라 국민들에게 예의바르계,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위선양도 되리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국경, 우리의 '휴전선'으로 말하면 비무장지대를 통과했다.^^
평생 잊지 못할 석양과 바다 오르간의 낭만에 취해 보기^^ 바다색과 햇빛의 감성에 젖느라, 사진 촬영의 여유도 예쁘기만한 여행객들이 줄지어 걷고 또 앉아있다. 잠깐의 머물기, '자다르'에 오래 머무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반나절이면 다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작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안목항의 저녁놀, 어느 고즈넉한 카페에서, 커피향에 젖던 시간이 생각난다.
'Land Gate', 르네상스 양식의 걸작이라고 들었다. 삼면이 아드리아해와 접한 구시가지의 남쪽에 자리잡은 메인 출입구로, '땅의 문'이라는 뜻이다. 1543년 이탈리아 건축가 '미켈레 산미켈레'의 설계로 세워졌졌다. 과거 '자다르'는 튼튼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 도시였으며, 베네치아 공화국 시기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랜드 게이트' 정면의 날개 달린 사자상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위용을 나타낸다. 19세기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1세'에 의해, 요새는 대부분 허물어졌지만, '랜드 게이트'를 포함한 일부 성곽과 문이 남아있다.
노을의 도시, 바다가 노래하는 도시, 유적의 도시로, '자다르'는 '크로아티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란다. 3천여 년 전의 역사가 살아숨쉬는 도시다. 숱한 침략과 전쟁이 도시를 휩쓸어도 과거의 잔재를 털고 일어나 달마티아의 주도시가 되었다.
여기는 '다섯 개의 우물광장'이다. '자다르'에 식수를 공급하던 우물', 16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대비하여, 요새 안에 고립될 경우 사용할,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 저수지와 우물을 만들었다. 19세기 군사적 요새의 역할을 다할 때까지 식수공급,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어역사적 가치가 높다. 광장에는 높이 26m의 '선장의 탑'이 있으며 1829년에 개장된,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공원인 '엘레나 미디예브케 여왕공원'이 있다. 공원이 바로 군사적 요새의 목적으로 건설된 과거 '그라마니 요새'였다.
구시가지에는 고대부터 중세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고, 새로 조성된 해안 산책로에서는 파도 소리와 찬란한 빛이 어우러진 낭만적인 한 때를 즐길 수 있으리라. 시간이 빠듯해, '학교'(^^)도 급히 들르느라 분위기만 감상했다.
'성 도나투스 성당' 앞이다. '자다르'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명소 중 하나다. 9세기에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크로아티아의 로마네스크 이전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사례 중 하나라고 한다. 이 도시의 이름은, 9세기에 살았던 '자다르의 도나투스' 주교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며, 그는 도시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책에서 읽었다. '성 도나투스 교회'는 인상적이 돔이 있는 원통햐 모양을 하고 있으며 뛰어난 음향효과로 유명하다. 음향이 정말 뛰어나서 교회에서는 음향 특성을 활용하기 위해 종종 콘서트와 공연을 개최한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영화감독 '알프레으 히치콕'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의 도시'라고 극찬했을 만큼, 해질 무렵 아드리아해를 품은 자다르, 예쁜 커피잔도 그 노을빛을 받고 있었다. 해질 무렵부터 밤풍경이 더 아름다운 도시일 것 같아, 되레 밤바닷가를 거닐고 싶어진다.
2024년 8월29일(목), 아름다운 '크르카국립공원', 눈부신 아드리아해를 품은 '스플리트', '메주고리예',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를 드나들며
'스플리트'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크르카 국립공원'이다. '크로아티아'의 '크르카 계곡'(Krka National Park)은 '크르카 강'을 따라 펼쳐진다. 이 계곡은 특히 폭포로 유명하며, 그 중 이주 유명한 '스크라딘스키 부크'는 여러 개의 작은 폭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봄과 가을이 방문하기 좋은 시기로, 날씨가 온화하고 여름에 비해 관광객이 적어 더욱 쾌적하게 돌아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틈바구니에서 이런 사진 찍기도 전광석화를, 폭포처럼 쏟아냈다.^^ '크르카 강'이흐른다. 달마티아 지역에서 흐르는 72.5km, '디나리츠 산'에서 발원하여 '시베니크' 근처 바다로 흘러간다. 지상낙원 폭포가 아름답다.
중국식 점심을 '수플리트'는 수도 '자그레브'보다 큰 도시다. 중국식당에서 점심,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서 시작되는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여행이다. 아름다운 풍경 감상과 함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숨결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고대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은퇴 후 살았던 궁전이다.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볼까나?^^ 궁전은 마치 시간의 벽을 넘어 고대 로마로 직접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 곳이다. 황제가 은퇴 후 자신만의 안식처로 삼았던 이 궁전은, 그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스플리트'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배어 있을 것 같았다. 좁은 골목을 따라 걷다보면, 1700 년 전 이곳을 거닐었던 사람들의 발자취가 느껴질 만큼 생생한 역사가 숨쉬고 있다. 발칸반도의 모든 나라가 그렇다. 내가 아내와 걷는다는 것도 역사의 기록이다.
궁전을 지나면 '성 도미나우스' 대성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성당은 원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영묘였지만 이후 대성당으로 개조되었다. 로마시대의 웅장함과 기독교적 경건함이 공존하는 이곳에서느, 역사책에서 읽을 수 없는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고도 남는다.
'페리스틸 광장', 궁전의 중심부에 위치한 고대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과거 황제를 위한 행사들이 열렸던 장소다. 광장의 웅장한 기둥들 사이에 잠시 멈춰 서면, 이곳에서 펼쳐졌을 제국의 화려함과 위엄이 상상 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레고리 닌스키 주교상' 앞에서는 소원을 비는 곳이란다. 발가락 쪽이 반들반들, 태양도 그 성스러움을 빛내주려는가 보다. 이 거대한 동상은 크로아티아의 자부심과 독립을 상징, 발가락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 이 발가락을 만지며 작은 기적을 기대하며, 더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스플리트' 여행의 끝은 '리바해안 산책로'에서 마무리 된다. 해안가를 따라 펼쳐진 이곳은 '스플리트'의 활기찬 일상을 맛볼 수 있다. 카페에 앉아 현지 커피를 마시며 파아란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순간 이번 '스플리트' 여행이 평생 기억에 남을 특별한 추억이 됨직하다.
도시 시계와 시청, 고대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이 도시에서,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늘이든 양지든 가릴 것 없이, 여기저기 듬성듬성, 홀로 또는 두샛,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앉아 마음의 회포를 풀어내는지 알 수 있었던 시간이다. 여행은 수천 년의 시간을 함께 걸어온 듯한 느낌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고대 로마유적부터 활기찬 '리바해안' 산책로까지 이곳의 모든 장소가 살아있는 역사의 일부다. 발칸반도는 역사책이다.
말로만 듣던 '모스타르'에 입성,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가 연방으로 합쳐지기전, '모스타르'는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였다. 오스만 터키가 발칸을 지배하던 시절, 이슬람을 믿는 자에게 세금을 면제해주자, 이 지역 사람들이 개종을 하여 이슬람을 믿기 시작했고, 지금도 '보스니아' 지역에서는 이슬람교도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오스만 터키'의 지배시절에 '오스타로' 지역의 강에 놓여있던 나무다리를 아름다운 돌다리로 놓아주면서 주민들의 왕래가 쉽도록 했다고 한다. 그렇게 평화의 상징이었던 다리가 '보스니아' 내전의 시발점이 되었고 종래는 파괴되었다. 그래서 유네스코와 유럽 여러 나라의 도움을 받아, 흩어진 잔해를 모아 복원한 것이 1997년이었다고 한다.
'스타리 모스트(오래된 다리)'는 1566년 발칸전쟁 이후 오스만제국의 '화려한 황제' 쉴레이만의 명에 따라 건설된 것으로, 강위에 높이 치솟은 아치가 인상적이다.
발칸전쟁은,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가 같은 정교를 믿는 '보스니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슬람과 가톨릭을 믿는 보스니아인들을 공격한 것이 발칸전쟁의 시작이었다. 초기에는 이슬람과 가톨릭이 연합하여 '세르비아'를 물리쳤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가톨릭계가 다시 '보스니아'의 이슬람을 공격하여 4 년여 동안 몇 만 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는 시발점이 된 다리가 '모스타르 올드브릿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랜 분쟁의 역사 만큼이나 다양한 문화를 간직한 '모스타르', 로마시대의 성부터, 1556년에 건설된 '스타리 모스트'(오래된 다리)와, 터키 지배하에 지어진 '모스크'까지 자갈돌이 깔린 도로를 따라 이어진 건물들은, 각기 다른 문화를 품고 있다.
아름다운 발칸의 자연 위, '참 좋은 여행'을 즐기는 순간마다 다양한 문화와 전쟁의 상흔들, 이런 희비가 교차하다니, 인류평화의 깨달음을 위해서라도 '발칸반도'를 방문해야 할 이유랄까?^^
'모스타르'는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유학한 곳으로 유명하다. 유럽 시골의 한적한 도시에서 은둔하면서 유학을 했었다고 한다.
'모스타르'는 한때 ''헤르체고비나(보스니아)'의 수도였던 지역이다. 또한 양 민족의 화해의 상징이었으나, 보스니아 내전의 시작과 함께 몇 백년 간 이웃이었던 사람들끼리 서로 적이 되었다. 아직도 총탄의 흔적이 남은 건물이 많았고, 그때를 잊지 말자는 의미로 남겨 두었다는, 반파된 건물들도 곳곳에 보였다. 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는 아직도 모른다고 한다.
'모스타르' 탐방이 끝내고 저녁무렵 6시 30분 경 '메주고리예(Medjugorje)'에 이동했다. '메주고리예'는 슬라브어로 '산과 산 사이의 지역'이라는 뜻을 가진, 한적한 농촌이었으나, 마을의 여섯 아이들이 성모 마리아를 직접 보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이 지역이 성모발현지로 알려지면서, 가톨릭 신자들의 세계적인 순례지로 유명해졌다. 미사가 집전되는 야외 뜰에서 조금 걸어가면, '치유의 청동예수님상'이 있다. 청동 부조상 주위로는 '예수 고난의 14처'가 타일로 조성되어 있다. 이 청동 예수상은 십자가에서 막 일어선 모습으로, 신기하게도 오른쪽 무릎 부근에서 물기가 흐른다. 이 물을 신자들은 '성수'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예수님상 앞에 줄을 서 있는데, 그것은 이 예수님의 상처를 닦아준다는 의미도 있고, 한편으론 종이나 손수건에 '성수'를 묻혀, 환자의 아픈 부위에 대고 간절히 기도하면 상처가 치유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마침 저녁미사가 집전되고 있었다. 팀장님은 우리에게 대단한 행운이라고 했다. 감사, 화해, 사랑과 소통, 예의를 다해 기도하였다. 차례를 기다리다 내일 아침을 기약했다.?
순례자를 위해 열려 있는 '성 야고보 성당' 안이다. '메주고리예'의 본당은 1892년에 설립되어, 순례자들의 수호성인인 '성 야고보' 사도에게 봉헌되었다. 지금의 '성 야고보' 성당은 1969년에 새로 완공된 것으로, 본당 신자들과 순례자들이 이용하고 있다. 그 뒤 '성 야고보' 성당은 2000년에 교구성당으로 지정되어 순례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지역의 중심 성당으로 항상 열려 있다고 한다. 두 개의 종탑을 가진 교회 입구 벽에는, 예수님이 일생 중에 체험한 다섯 가지 신비를 말하는 장면을 모자이크로 처리하였다. 내부 고해성사실 중에는 한국어로도 가능한 곳이 있다고 한다.♣
성당 오른쪽 광장에는 야외 미사를 위한 제단과 5천석 규모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 순례자들을 위해 야외 제단에서 밤낮으로 미사가 열리며, 늦은 봄부터 추운 겨울이 되기 이전까지 미사가 집전된다. 요즘은 세계 각처에서 몰려오는 신자들을 위해 언어별로 시간을 정하여 미사를 진행한다. 한국인 신도를 위한 미사 시간도 있다. 1981년 이후 지금까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이천오백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늦은 밤거리의 기념품 가게의 성모 마리아님과 예수님 상들, 마치 생명을 되찾아 살아 숨쉬며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은총을 내리며 두 팔을 들어 미사 기도를 하는 것같다. 덩달아 저 행인상처럼 경건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늘 밤 이후 더 겸손해지며, 상대에게 더 다정하고 친절헤져야겠다. 지나는 관광객이나 현지주민 들에게는 미소와 예절을 다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인상을 좋게 해 드려야지.♥★?
2024년 8월30일(금), 성모발현 세계의 관심, 드디어 '메주고리예'에 도착했다. '성야곱'성당, 평화의 '성모상', 치유의 '청동예수상', 이름없던 작은 농촌마을이 가톨릭 성지가 되었다
7시가 식사시간 계획이지만, 아침 4시40분 기상했다. 엊저녁 다하지 못한 성당참례를 위해서다. 성당을 찾아 큰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길을 못 찾아 좀 헤맸다. 현지 어른에게 물었다. 고맙게도 지름길도 알려주었다. 골목에서 나와 성당을 발견하는 순간 기쁨도 잠시, 성당 종탑에서 아침 6시 종을 울린다. 종소리가 온 마을을 내달리다 내 가슴에 더욱 울림을 준다. 길 위에서 성당을 찾아 헤매며 어렵게 찾아든 우릴 마치 축복이라도 내려줄 듯하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어젯밤 어둠을 무릅쓰고 버스 창밖을 더 살폈어야 했는데♥.
여명의 '성 야고보 성당', 이곳으로부터 약 1㎞ 떨어진 곳, 성모 발현언덕이 있는 '크리니카 산'의 해발 520m 정상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이곳을 '십자가 산'이라고 한다. 8.56m 높이의 콘크리트 십자가는 예수의 수난 1,900년을 기념하여 1934년 3월 15일에 완공되었다.
이 '십자가 산' 정상에 이르는 길에는 15처 각처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조각이 있고, 이 조각에는 성모의 모습도 새겨져 있다. 그토록 많은 순례자가 '십자가 산'을 찾는 것은 '메주고리예'의 성모 발현 이후 십자가 위에서 기이한 빛과 다른 징표들을 보았다는 주장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모 발현과 그 메시지를 하느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연결시켜 해석한다. 그래서 또한 성지순례자들은 봉헌과 함께, 그리스도 구속의 십자가 체험을 위하여 '십자가 산'의 길을 따라 기도를 드리며 오른다.
교회 입구 광장에는 조각가 디노 펠리치(Dino Felici)의 작품인 '평화의 성모상'이 서 있다. 왼쪽에는 ‘고해성사의 사도’, ‘일치의 사도’로 불리는 성인 '레오폴도 만딕(St. Leopold Bogdan Mandic)'의 상이 있다. 성당 오른쪽 광장에는 커다란 나무 십자가 주위로 기도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나는 물론이고 아내는 특히 저쪽에 보이는 '크르니카 산'(십자가 산)의 가지런히 빛나는 가로등 불빛을 보며, 기도하며 오르지 못한 것을 내내 아쉬워하였다. 나도 못내 안타까웠지만, '플로라'를 어떻게 달래줄까 한참을 망설이기도 했다.
'HOTEL REONARDO'에서 아침을 먹고, 8시10분 버스 출발, 9시23분경 '보스니아' 출국, 다시 '크로아티아' 입국 수속을 밟았다. 약 1시간 뒤 '크로아티아'쪽 아드리아해(지중해)를 통과, 두 나라 국경을 번갈아 오가는 날이었다.^^''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에 있는 도시, 아드리아해에 연하여 있으며, 1808년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하기 전까지는 독립공화국이었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도시라고 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네움을 사이에 두고 크로아티아 본토와 단절되어 있는 월경지이다. 하지만 여행자는 간단한 여권 검사만으로 두 지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떨갈나무(두브라마)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지명이 붙었다.
구시가지의 주게이트 '필레게이트', 가장 큰 출입문이며 구시가지 관광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필레 게이트'를 통과하면 '두브로브니크'의 구시가지의 중심, '플라차대로{PLACA STREET)'가 펼쳐진다. 구시가지를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 모든 관광지가 이 대로와 이어진더고. 이곳은 '성 사비오르 성당' 맞은편에 위치한 '오노프리오 분수'이다. 이 도시의 최초의 식수원이다. 성벽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식수가 항상 문재였으리라. 이 도시인들은 당시 로마의 건축가 '오노프리오'를 초청해 식수난을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12km 떨어진 '옴블라랑 강'에서 물을 끌어와 분수를 만들었다. 평소에는 14 개의 분수로 설계, 오늘날 성수기에는 6 개, 비성수기에는 3 개만 이용된다.
'두브로니크 대성당(수도원)'은 가장 큰 성당, '성모승천대성당'이라 불리고 있다. 12세기 영국의 왕 '리처드'의 기부로 건축되었으나 대지진으로 파괴, 이후 바로크양식을 적용해 재건축되었다. 지금의 성당은 7세기, 12세기, 18세기 모두 3번에 걸쳐 지어진 성당으로, 성당 내부 박물관에는 '성 블라이세'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골목길 속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두브로브니크'를 걷다 보면 마치 중세시대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중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대도시의 골목길을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이 도시가 품고 있는 비밀스러운 역사와 마주하는 기분이다.
광장 끝 구석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BUZA카페'가 있다고 팀장이 알려주었다. TV드라마 '꽃보다 누나'에 등장했던 그 장소로 아드리아해를 내려다보며 마시는 맥주 한 잔은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느낌에 '인산인해', 우리는 마음을 돌려세웠다.
'스트라둔(STRADUN) 거리', 필레게이트부터 '루자광장'까지 약 280m 거리로, '두브로브니크'의 중심 거리다. 사람이 정말 많다. 뭘하면 대기줄도 길고, 물가도 이 나라에서 제일 비싸다고 한다. 아일랜드 출신의 문학가 '버나드 쇼'는 이곳을 지상낙원이라고 표현했고, 유럽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휴양지 1위로 꼽히기도 했다. '발칸반도' 어디가 안 그럴까?^^
'플라차대로'를 쭉 따라가다 보면, '두브로브니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시장, '군둘리치 광장시장'이]을 만날 수 있다. 매일 오전 광장에서 열리는 소규모시장으로, 청과물부터 수제 치즈, 향신료와 식료품, 특산물 등 다양한 물건들을 판매한다. 여행지에서 전통시장(재래시장)과 현지물품을 즐기는 것은, 단순한 물건 사기를 넘어, 현지인들의 생활상과 문화를 깊이 체험하는 특별한 경험이다. 아내와 국내외 어느 곳을 가든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시장마당임에랴.
2024년 8월31일(토), 유네스코 문화유산 '코토르'로 이동, 고대성벽 조망, 6백년이 넘은 '시계탑', 구시가지 탐방 뒤, 알바니아 '쉬코드라'로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에 이어 '몬테네그로'의 아침, 'HOTEL AUREL'를 출발하기 전이다. '몬테'는 '산'이란 뜻이고, '네그로'는 '검다', 이름하여 '산이 검다'는 의미라고 배웠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코토르'로 약 1시간30분 이동한다.
'성모성당' 종탑과 정문 쪽이다. 인공 섬인 바위 위의 성모 섬과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있는 '성 조지' 섬으로 유명한, 중세마을 '페라스트', '바위의 성모 섬'은 페라스트의 어부들이 만든 인공 섬으로, 1452년 현재 자리에서 성모와 아기 예수의 성화가 발견되자, 어부들이 그 자리에 바위를 실어나르고, 선박을 침몰시켜 섬을 만들어 1632년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1722년 확장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로마 가톨릭 성당을 재건한 것이다. 암초 바위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주변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상당히 넓은 선착장 주변, 인공 섬의 토대석이 매우 반듯하고 견고하다.
이 풍습이 약 2백 년간 이어져 지금의 9백평 규모의 인공 섬이 만들어졌다. 안에는 성모 마리아 그림을 비롯한 여러 유물을 볼 수 있다. 1452년 어부들이 발견했다는 전설 속의 성 모자의 이콘이 있다. 그리고 마리아 탄생부터 죽음까지 여러 유화가 있다. 17세기 '페라스트'의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다.
'몬테네그로'의 '코토르만' 한가운데에 조그마한 섬 두 개가 있다. '성 조지 섬'과 인공으로 만들어진 '성모 섬'(로마 가톨릭의 성모성당)이다. 페라스트 마을에서 배를 타고 가야 한다. 자연 섬에는 나무가 있고, 인공 섬에는 나무가 없다.^^ '암초 위의 성모성당'은 1722년 재건된 바로크양식이다.
'헤르체그노비'는 '코토르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해안도시로, 한때 크로아티아와 '두브로크니크'가 해양무역에서 경쟁관계에 있던 도시다. 여러 민족의 침략과 점령으로 다양한 건축양식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는 마을이다. 현지시간 15시5분경 '부드바' 항구도시에 도악했다. 인구 1만 명의 '몬테네그로'의 대표 여름휴양지다. 아담한 소도시, 해변가에 자리한 성벽이 독특한 풍광을 이루는 항구도시로, 현지인 뿐만 아니라 인근 유럽인들이 휴가를 보내려 삼삼오오 모여드는 곳이다.
12세기에 건립된, '코토르'를 대표하는 '성 트리폰 교회'는 비슷한 듯 보이지만, 모양이 다른 두 개의 종루가 인상적이다. 성당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코토르 성당의 경건함을 찾을 수 있어 좋았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의 아름다운 디자인, 역사적인 건물이다.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광장 주위로는 레스토랑과 브랜드 브티크, 수제 치즈가 쌓여 있는 시장통이 있다. 쨍쨍 때볕에 토마토와 바나나 등 과일듷이 더위를 무룹쓰고 파리들에 들러싸여고 땀을 쏟고 있는 듯했다.?
'몬테네그로', 그 이름만으로도 아름다운 해안과 역사적인 도시로 떠올릴 수 있다. '몬테네그로'의 아름다운 보석, 헤르체그노비'다. 자연과 역사의 아름다움을 더한 곳이다. 투명한 바다, 오래된 성, 그리고 매력적인 골목길로 가득차 있다.
'헤르체그노비'를 방문하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이곳의 평화로움과 행복한 분위기였다. 역설적이게도 과거의 아픔이 현재의 잔잔함이랄까? 발칸반도가 그렇다. 마을 성곽읋 산책하며 작은 상점, 카페, 그리고 공원도 뱔견했다.
'헤르체그노비'는 '오리엔 산'에서 '코토르만'으로 이어지는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구시가지는 해안에서 위쪽으로 연결되는 많은 계단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특징이다. 이곳은 바다와 산, 역사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성과 관련된 이야기와 함께 마을의 문화적인 측면을 탐방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역사적인 보물, 그리고 친절한 현지주민들과의 만남은 여행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헤르체그노비'의 여행은 '몬테네그로'의 숨겨진 옛것을 발견하는 찬란한 기회였다. 천혜의 절경을 따라 형성된 '코토르', 여행을 즐기는 이들에게 알음알으 알려진 곳이다.
'코토르'는 수백 년 동안 고양이와 함께 한 도시로, '고양이 박물관'은 고양이를 주제로 한 독특한 박물관으로, 이 도시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특별한 경허ㅏㅁ을 선사한다. 상점에는 고양이 무늬를 넣은 의상과 상징물(마그네틱)이 넘친다.
코토르'를 지나 '부드바' 항구도시로 향하던 버스는 '스베티 스테판' 섬이 내려다보이는 도로 한켠에 운좋게 주차했다. 전혀 다른 도시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저 아래의 섬, 잘 다듬어진 너무들, 오랜 세월 동안 많이 아팠을 것 같은 안쓰러움, 금수저들만이 모여 있다는 지붕들도 허영에 빛나는 태양이 눈부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엘리자베스 테일러', '소피아 로렌' 등 유명 배우들의 휴양지라나?^^ 해변 백사장 사용에도 '금수저'와 '흙수저'의 경계선이 있다고.??
아드리아해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푸르다. 굽이굽이 해안도로는, 우리강원도의 '정선아리랑', 구정양장 이어진다. 언덕 위에 들어선 중세풍의 마을들은 어느 장면을 떼어내도 한 장의 엽서다. 지중해의 대표작물은 올리브와 포도, 지중해성 기후에 알맞은, 잘 적응하여 자라는 초목이다. 우리의 강원도 동해안 경포대 같은 'BAR(빠르)', 여기서 해변이 끝나면서 산맥을 타고 버스는 땀을 흘리며 힘든 소리를 낸다. 나도 덩달아 허리에 힘을 준다. '오니치니' 도시를 지나 산쪽으로 15분덩도 오르니 휴게소가 나왔다. 모두에게 엄청 반가운 장소다.
17시50분 '몬테네그로' 국경통과 출국, 17시 55분 '알바니아'에 입국했다. 현재 경제개발도상국이다. 우리 남한의 1/4 크기, 인구 212만, 수도 '티라냐' 42만 명 정도란다. 2013년 유럽연합가입을 신청했지만 성사되지 못했고, 가난과 문맹률이 높은 무슬림국가다. 70%가 산악, 특이하게도 1994년부터 야생동물 사냥이 금지되었다. 크롬,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 지하자원 풍부, 그래서 과거로부터 주위의 침략과 점령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화폐 단위 '네크', 1유로는 100네크 정도다. 물가가 좀 싼 편이다.
저녁 6시25분 숙소 'RUZAFA HOTEL'이 있는 도시 '쉬코드라'에 도착하여 아내와 밤풍경을 즐겼다. 카페에 둘이 앉아 도란도란, 두런두런 밤 11시가 넘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2024년 9월01일(일),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 독립운동 장군을 기린 '스칸데르베그' 광장, 모스크와 시계탑, 그리고 호반의 도시 '오흐리드'
아침6시 기상, 7시 호텔조식, 8시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로 약 2시간 반을 이동했다. 12시경 광장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그린 샐러드, 치킨, 디저트)을.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는, 알바니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다. 17세기초 터키의 쉴레이먄 '파샤' 장군이 이슬람사원을 세우며 마을을 만든 것이 그 시초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으며 유럽에서 화창한 날씨를 가진 도시에 속한다. 거리의 가로수는 우산 형상의 소나무다. 학처럼 밝고 고고한 분위기를 풍긴다.곧은 줄기가 위로 자라서는 몇 갈래로 나누어진다.우리나라 소나무로는 반송과 닮았다. 우산 소나무의 원산지는 지중해로, 남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 등 지중해 연안에서 자란다.
'티라나'는 15세기부터 오스만터키의 지배를 받았고, 1912년에 독립했다. 공산주의 붕괴후 '티라나'는 3차산업이 급속히 발전하고 금융업과 통신산업이 발달하였다. '티라나'는 오스만제국이 이곳을 정복한 다음 해인 1418년에 베네치아문서에 기록되었다. 1941년 알바니아 공산당이 만들어졌으며, '엔베르 호차'가 그 지도자로 등장했다. 1986년 '마더 테레사'가 '티라나'를 방문헸다. 그녀는 '유고슬라비아' 출생이시다. '알바니아 티라나공항' 이름도 '마더 테레사공항'이다. 티라나대학 학생들은 1990년대 초기에 정치적 자유를 요구했다. 대학 캠퍼스에서 시위가 시작하여 '스칸데르베그 광장'에서 엔베르 호차'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끝났다.
'스컨데르배그' 광장의 '스칸데르베그' 동상 앞이다. 오스만튀르크 무슬림 침략으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지킨 왕이라고 한다. '스칸데르베그 광장'은 티라나 여행의 시작점이다. 발칸반도 현재 온도는 최저 14도(13도)에서 26도를 오르네린다. '스칸데르베그' 장군의 용맹함을 인정하여, '알렉산더 대왕'과 관련된 이름 '스칸데르(Skander)', '군사령관'이란 뜻의 '베그(Beg)'를 붙였다고 한다. 광장 규모는 '티라나' 주민들이 다 모여도 수용할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사람들로 넘쳐났다. 보이는 이들마다 '독립기념관'을 방문하듯, 생기가 넘치고 기념과 추념의 의식을 갖추고 마음을 가다듬고 걷는 듯했다. 특히 관광지에서는 현지인들의 생활습관이며 문화를 존중하고,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에게는 감히 함부로 대하는 인상을 주지 않갰다고,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올레오름' 길을 걸으면서도,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 나그네의 예절이라고 생각하였다.
민족영웅들의 투쟁 발자취 아래의 저 3인방, 현지인이거나 관광객이거나 우연일까, 조국의 민주자유를 목마르게 외치는 독립투사들의 민주화를 위한 항쟁의 발걸음이다. '무릇 지위가 사람을 만들고, 자연은 사람의 기운을 올바르게 만든다.' '스칸데르베그'는 1405년 중부 알바니아의 영주의 아들로 태어나, 1445년 3백여 명의 알바니아인들을 이끌고 오스만 재국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며,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는 베네치아공화국과 나폴리왕국, 교황청과 동맹을 맺고 알바니아 북부 지역을 통일한 인물이다.
날씨 좋은 '스칸데르베그 광장'은 쉬면서 놀기 좋았고, 알바니아 사람들의 일상을 카페에 앉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묘미다. 틈만 나면 아내와 둘이서 카페 앉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듯, 마치 우리나라 안목항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듯, 드넓은 광장의 커피맛을 즐겼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에스프레소'의 매력에 빠져, 아주 오래 전부터 이탈리아 '에스프레소'의 향수에 젖어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에스프레소'는 영어 'Express', 여기에 물을 타서 대적(?), 명칭을 창조한 것이 '아메리카노(아메리카인의 것)'다. 유럽 사람들은 내부에서 커피를 즐기기보다 노천카페의 밖에서 마시기를 좋아하나보다. 탁자가 모두 야외에 놓여있다.
15시30분경 '알바니아' 국경을 지나 '북마케도니아' 국경 통과, '오흐리드' 시내로 들어섰다. '오흐리드'는 '북마케도니아' 남부에 있는 도시다. 해발 600m~900m, 인구 5만6천 명 정도, 나라 전체의 인구는 약 7백만 명이다. '오흐리드 호수'는, '북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의 국경지대에 걸쳐있고, '북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와 '스트루가', '알바니아'의 '포그라데츠'까지 3개 도시 약 13만 명이 호수주변에 살고 있다. '북마케도니아'쪽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알바니아'쪽 호수도 휴양지이다. '오흐리드'에는 한때 3백여 개의 예배당이 있어 발칸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역사적인 건축물들의 조화, 유네스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동시에 등록된 명소이다. 발칸반도를 여행하면서 좋았던 점 3가지는, 생각보다 안전, 저렴한 물가, 아름다운 곳들이 많다는 것이다. '오흐리드'는 사랑스러운 곳이다.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것은, 사고나 재난의 위협보다는 흙에 접하는 느낌이다. 흙으로 된 오솔길을 지나고, 자신의 발은 흙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걷는 사람은 흙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무엘 요새'로 올라가다 보면, 고대 마케도니아 '원형극장'이 있다. 기원전 200년에 지었으며 헬레니즘 양식 극장이다. 현재는 아래쪽 부분만 남아있기 때문에, 이 극장에 몇 명이 앉을 수 있었는지 확실치 않다고.^^ 개방형 극장은 완벽한 위치에 있다. 극장을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언덕이, 공연 중 음향을 방해할 수 있는 바람으로부터 극장을 보호하고 있다. 고대 로마시대의 원형극장은 모두가 그랬다. 아시아에서나 아프리카에서도 그 기능은 현대를 초월한다. 로마시대엔 이 극장이 검투사들의 싸움 장소로도,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처형한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매우 싫어하는 장소로 빠르게 변해갔다고 한다. 이러한 혐오감, 로마 멸망 뒤 결국 이 지역 주민들에 의해 버려지고, 땅에 묻혀버렸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구조물이 잘 보존되었지만, 1980년대, 일부 주택주면의 건축공사 중에, 그리스 신 '디오니시우스'와 '뮤즈'의 조각이 새겨진 커다란 '돌 블록'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연극, 콘서트, 오페라, 발레공연 등 대중공연의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오흐리드 요새 '사무엘 요새'다. 오늘의 방문지 중에서 가장 무게감이 있는 장소다. 늦은 시각인지라 성곽 출입문이 닫혀있어 들어가지는 못했다. '스코페 요새'처럼 성곽을 둘러볼 수 있게 성곽을 따라 길을 만들어 놓았다. 북마케도니아 '오흐리드'의 구시가지에 있는 요새다. 이곳은 11세기초 '불가리아'의 '차르 사무엘' 통치 기간 동안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였다. 오늘날 이 역사적 기념물은 주요 관광명소, 2003년에 완전히 새로운 벽을 추가, 중새형태의 요새, 대대적으로 복원되었다.
성벽에 올랐다가 숲길을 걸어 내려오면 선물 같은 그림이 펼쳐진다. '북마케도니아'여행의 숨은 보석 '성 요한 카네오 교회(Church of St John at Kaneu)', 영화 '비포더레인'의 무대가 된 교회이다. 떨어지는 태양의 조명 아래 교회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오흐리드 호수'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서 멋진 풍경을 제공, 이 교회는 13세기에 건립되었으며, 동방 정교회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이다. 교회의 외벽은 백색, 북마케도니아의 오렌지색 지붕과 어우러져서 특별히 아름다운 색채대비를 이루고 있다. '오흐리드 호수'의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교회로 내려가면 작은 정원이 있어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일몰 시간에는 교회주변에서 멋진 저녁놀을 감상할 수 있어서 사진을 찍기에도 최적의 장소였다. 또한 교회 근처에는 다양한 식당과 카페가 있어서 휴식을 취하고 현지 음식을 즐길 수도 있다. 우리 둘은 '사무엘 요새'까지 두 번씩이나 오르내리며 주변 상황을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오흐리드 호수' 유람선 투어 대신 '사무엘 성채'까지 올라가기로 했었다. 이곳은 '북마케도니아'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 중의 하나이며, 이 환상적인 전망은 여행객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보통 우리가 저지르는 여행의 실수는 경치를 한쪽 방향에서만 즐기고 만다는 것이다. 갔던 길을 다시 되밟아 돌아오는 여정은 '이삭줍기' 같은 것이라고나.?
"작은 방안에/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 피우고/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모가지 잎은 잊어버려라/하늘 저 편으로/ 둥둥 떠 가는/저녁놀!//이 우주에/저보담 더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이랴/저녁놀 타고/나는 간다//붉은 꽃밭 속으로/붉은 꿈나라로//(오일도, '저녁놀')
2024년 9월02일(월), 북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 터키식 돌다리, 알렉산도대왕의 기마상, 터키탕,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동방시장
호텔(Hotel Sileks)에서 아침을 먹고, '북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로 약 3시간을 이동했다. '스코페'는, '북마케도니아의 수도, '바르다르 강' 상류에 위치해, 중부유럽과 그리스 사이를 잇는 중요 통로역할을 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다양한 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지만, 독립과 제2차대전 이후 빠르게 성장, 오늘날 다양한 문화유산을 보유한 근대도시로 성장하였다. 12세기 오스만제국 시대부터 상업의 중심지였고, 그래서인지 '터키'라고 해도 믿을 만한 분위기다.
'북마케도니아' 구시가지는, 오래된 거리에서 새로운 경험을 즐길 수 있는 멋진 여행지다. 이곳은 역사적인 건축물과 문화적인 유산이 어우러져 있는 곳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인기 명소가 되었다. 구시가지는 오래된 거리로, 다양한 상점, 식당, 카페, 박물관, 교회 등이 있다. 이곳을 돌아다니면서 독특한 '북마케도니아' 문화를 경험할 수 있으며,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도 있다. 이곳에서는 오래된 건물들이 아름다운 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 건물들은 터키, 이슬람, 바이질론, 로마, 슬라브 등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곳이 바로 발칸반도 최대의 목욕탕이라는 '파샤목욕탕'이다. 여러 개의 검은 돔 천정구조로 되어있다. 오스만터키 시대 1466년에 건설된 '다우트 파샤'로 부리었고, 지금은 마케도니아 국립미술관으로 변신하여 예술가들에게 전시공간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한국인 해설사) '터키탕'이 '아트 갤러리'로 변신할 줄을 누가 알았을까?^^마케도니아 사람들의 거리 표정을 잠깐 보았지만, 예술감각이 대단한다 보다.
'북마케도니아'의 정체성은 특이하다. 그리스와 관련이 되기도 하면서 과거 오스만제국의 분위기가 물씬 나기도 한다. '바자르'는 이슬람권에서 큰 시장을 일컫는 단어이다. '스코페'에는 거대한 '바자르'(전통시장, 재래시장)가 있다.이를 통해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린 '무화과'를 구입했다. 주인이 갑자기 외국손님이 몰려 들어서인지, 풍덩풍덩 많이도 퍼 주었다. 시식도 마음대로 하고, 너무 자유롭게 시식하는 것도 좀 거슬렸으리라.??? '바자르' 옆으로 큰 요새가 있다.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고 하여 따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동상이 많은 도시 '스코페', 어딜 가나 툭툭 튀어나오는 동상들을 볼 수 있다. '북마케도니아' 정부는 '스코페 2014'라는 프로젝트를 추진, 4 년여 동안 수억 달러를 들여 도시를 재생시켰다.(리모델링) 이때 수십 개의 다리와 건물들이 재건축되거나 새로 지어졌고, 또 수백 개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로부터 '동상의 도시'라고도 불렸다. 그 뒤 '스코페'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급증했다고 한다. 알렉산더 아버지 '필리포스2세 동상', 맨 아래 3 명은 '알렉산더대왕', '아버지', '엄마' 동상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2세'는, 기원전 336년 암살 당하기 전까지 '마케도니와 왕국'의 왕이었다. 중요 동상마다 분수는 필수, 물은 생명과 장대함의 원동력이다.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유치환, '셍명의 서'에서) '분수'의 염원과 일치하는 생명력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기마상'과 '북마케도니아' 국기가 우리를 반긴다. 중요행사는 다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마케도니아 광장'이다.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는 그들의 자랑인 '알렉산더 대왕'과 '마더 테레사'가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버지 덕분에 지금의 위대함을 누리고 있지 않을까" 부모의 마음으로 '필리포스2세'가 아주 궁금하다.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들의 가정교사로 만들어준 그는 어떤 사람일까? 훌륭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은 '알렉산더'의 원정길을 동행하며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란다.
'스코페'는 '마케도니아공화국'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고, 발칸반도의 중앙이며, 남북으로는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와 '그리스'의 '아테네', 동서로는 '불가리아'의 '소피아'와, '알바니아' '티라나'의 중앙에 있다. 동에서 서로 뻗은 '스코페 계곡' 안에 '그리스'의 '에게 해'로 흘러가는 '바르다르 강'을 따라 자리잡고 있다. 도시 크기는 동서로 30km 정도, 남북으로 10km 정도의 면적이다. '스코페'는 3500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도시였는대, 1963년 대지진으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그러자 각국의 원조, '마케도니아'는 이 원조금으로 시가지를 복원하고 새로운 수도로서 면목을 갖추었다. '스코페'는 지금 관광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때 건설된, 도시의 상징 '돌다리(Stone Bridge)'도 어기저기를 이어주고 있다.
'마케도니아 게이트'도 보인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전형적인 유럽의 거리다. 그래도 우리는 '올드타운(구시가지)'과 '바자르(재래시장)'가 좋다. 마케도니아 오기 전까지 몰랐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스코페' 출신인 줄을. 1910년 이곳에서 태어났단다. 안타깝게도 수녀님의 생가는 지진으로 인해 무너졌고, 당시에는 이렇게 중심거리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녀의 생가가 있던 곳 주위가 스코페 최고 번화가가 되었다.
2024년 9월03일(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칼레메그단요새, 종교가 혼합된 독창적 형태의 사보르나 정교회, 보헤미안의 거리, 메인 쇼핑스트리트 '크네즈 미하일로'를 걸어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6시 기상, 6시30분 식사, 8시10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향해 버스 출발, 9시15분에 '베오그라드' 시내로 입성했다. 크로아티아어로 '하얀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베오그라드'는 고풍스럽고, 인공적이 아닌 '자연환경'이 남아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의 수많은 기업들이 들어와 있으며, 종합대학과 3백여 개의 학교들, 과학예술 아카데미, 각종 박물관, 미술관을 보유,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인구 130만~150만이다. 여기는 '베오그라드'의 중심지 '공화국 광장'의 '국립박물관' 건물이다. '세르비아 공화국'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1844년 세르비아 작가에 의해 설립되었다. 비잔틴 시대 '프레스코화'와 유고 화가들의 작품들, 그리고 '고흐', '르누아르', '피카소' 등의 명화들이 소장되어 있다. '공화국 광장'에는 이외에도 '국립극장' 등 이 도시를 상징하는 여러 구조물들이있다.
'베오그라드'의 구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공화국 광장'의 '세르비아 국립박물관' 앞에는, '오스만튀르크'에서 해방시키고 발전시킨, '크네즈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1823~1868)' 대공(왕)의 기마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오그레노비치 왕가'의 시조인 '밀로슈 오그레노비치'의 아들로, 오스만튀르크의 완전 철수를 목표로, 1861년 행정부를 재정비하고, 왕권강화 헌법 공포, 그리고 세르비아 정규군을 창설, 터키군대와 무력충돌을 계속하여, '세르비아' 독립의 기초를 닦았던 계몽전제군주였다. 1868년 정적에게 암살당했다. '공화국 광장'이라는 이름은, 1945년 11월29일 '유고연방(유고슬라비아 인민공화국)'의 공포를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공화국 광장' 주변에는 쇼핑센터, 식당, 국립극장 등이 있어 항상 인파로 북적이는 시내 중심지이다. 문화행사와 공연이 있고, 만남의 장소로, 내국인과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크네즈 미하일로 거리'(왕의 거리)는 '베오그라드'의 '공화국 광장'에서 '칼레메그단 요새공원'까지 이어지는 보행자 전용거리이다. 곳곳에 관광객들을 위해 방향표시가 되어 있다. 옆길도 찍어보고^^ '크네즈 미하일로 거리'는 동유럽 어느 도시나 존재하는 보행자 천국이자, 메인 쇼핑스트리트다. 거리의 양편에 187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즐비하다.
'크네즈 미하일로 거리'는 1km 정도로 이어진다. '동유럽의 화약고'란 별명이 있는 '베오그라드'는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수도, 그 기반 시설이 많이 남아있다. '베오그라드'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크네즈 미하일로 거리'는 19세기말, 터키식 건물들을 밀어버리고 만든 길이다. 여기는 '분수대'가 있다.
보헤미안의 거리 '스카다리아', '세르비아'의 '몽마르뜨 언덕'이라 불리는 '스카다리아'는 '베오그라드'의 대표적인 문화거리다. 19세기초부터 '세르비아'에서 예술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곳으로, 현재는 관광명소로 꼽히고 있다. 오래 전부터 카페와 레스토랑 밀집지역으로 유명했던 만큼, 저마다 개성 넘치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낡은 건물에는 알록달록한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골목과, 돌로 포장된 도로는 '스카다리아'만의 분위기를 만들어준다.곳곳에는 작은 갤러리도 위치하고 있으며, 조각상도 만나볼 수 있다.천천히 거리를 구경하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았다면 잠시 들러 여유를 즐겨보고도 싶은 곳이었다. 사진은 '주네 압스타' 청동좌상이다. '스카다리아'를 드나들던 예술인 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작가 겸 화가였던 '주네 압스타(1832~1878)'이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저녁에 시인들과 예술가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 모임을 주도했다고 한다. '세르비아'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로 '빈'과 '뮌헨'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세르비아'에 낭만주의를 전파한 사람이다. 현재 그의 집앞에 1990년에 세운 그의 청동좌상이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무릎을 만지면 관절염이 낫는다는 설이 있어 무릎이 반질반질하다.
'크네즈 미하일로 거리'의 '고도와 방향 표지석'이다. 고도는 116.75m, 평행 북위방향이 써 있다.
'사보르나 정교회', 세흐비아 정교회는 전통적인 가톨릭과 '세르비아 민족종교'가 혼합된 형태의 종교이며, 발칸반도에서 최대규모의 정교회 건물로 '크네즈 미하일로' 왕의 부친인 '밀로시'가 짓기 시작하여 '미하일로'가 넓혀 나갔다. 정교 국가로서 최초로 교구를 설립한 곳이다.
'베오그라드'에는 '다뉴브강'(도나우강)과 '사바강'이 흐른다. '베오그라드 요새'는 이 두 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요새 내부까지 들어가는 건 입장료가 있다. 요새 밑은 '칼레메그단'이라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안에는 박물관도 있고, 동물원도 있는 규모가 굉장히 큰 공원이다. 당연히 이 공원도 반려견 환영,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다. '칼레메그단 요새'에서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하얀 도시, 하얀 성채, 하얀 성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곳은 '세르비아'에서 유명한 역사적 장소이다. 터키어로 '칼레'는 '요새', '메그단'은 '전장'을 뜻한다. 이 지역은 BC 3세기에 '켈트족'이 최초로 정착하였고, 이후 지정학적 중요성, 군사요새가 여러 번 건설되거나 증축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1740년대 세워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곳곳에 많은 무기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아마도 내전 등 많은 전쟁을 치른 흔적이 아닐까? 지금은 '베오그라드'의 상징이자, 공원화되어 주민들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다.
'월드컵 축구경기'를 비롯한 유럽의 유로파 리그 축구' 경기에서는, 항상 장래가 창창하고 뛰어난 발재간으로 세계인들을 열광시키는, 젊고 날렵한 축구선수들이 탄생한다. 이곳 여러 광장은 세련된 베오그라드 청춘들의 집결지이기도 하며,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만남과 행복의 충전소임에 틀림없으리라. 도시의 고요함 속에서 느껴지는 강인함과 오랜 전통의 숨결을 상점의 운동선수 '유니폼'에서 실감할 수 있다. 유럽이나 그외 대륙의 원정경기에서 '세르비아' 출전 선수들을 TV중계에서 자주 들어보곤 했었다. 경기장에서 만큼은 오로지 거칠기만한 세계 제일의 축구선수가 상대편 선수에게, 뜻밖에 베푸는 겸손과 예절바른 배려는 언제나 세계인을 열광시킨다.
오흐 10시 42분쯤 우리의 전용버스는,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로 출발했다. '불가리아'는 1 시간의 시차, 지금까지의 시간보다 1시간이 빠르다. 이동에는 5 시간 정도 걸린다. 13시20분 'HOTEL NAIS'의 식당에서 3단계 요리를 점심으로, 14시에 다시 출발했다. '소피아'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둘이서 오랜만에 도시의 야경을 즐기며 걸어다녔다. 욕심 없어 보이고, 친절한 현지인들이었지만 항상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2024년 9월04일(수),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로 이동, 중심 '네멜리아 광장', 고대 성채도시, '세르디카', '벨리코투르노보', 구시가지를 한눈에 '성모승천대성당'
아침 6시 기상, 7시 식사, 8시10분 소피아로 출발했다.10시30분경까지 '소피아' 시내를 둘러보았다. 11시10분경, 20분 동안 중간 휴게소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의 여유를 즐기먀, 여정을 기록하기도 했다. 점심은 3단계^o^현지식이다. 카지르바(돼지고기), 샐러드(양배추, 오이, 양배추, 양파 등 목동들이 먹던 음식), '스카라'는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등을 숯불에 양념 안 치고 구워서, 올리브오일, 허브, 실파를 올린다.
'불가리아'의 아름다운 도시 속으로, '불가리아'는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지닌 나라다. 초기에는 트라키아인, 마케도니아인, 로마인 등이 지배했고, 7세기에 슬라브인과 불가르족이 융합하여 현대 '불가리아'의 기초를 다졌다. 중세에는 '불가리아 재국'이 큰 영토를 지배하다가, 뒤에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1908년에 독립,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다양한 역사적 변화를 겪었다. 현재는 EU 회원국으로, 다채로운 문화와 역사를 지닌 나라로 알려져 있다. '벨리코 투르노보'는 우리나라 '경주'와 자매도시이기도 하다. 관광도시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소피아'의 '세르디카(Serdica) 유적, 지하철 공사 중에 발견한 로마시대 유적, 고대 성채도시 '세르디카'의 유적이다. '세르디카'는 비잔틴 시대 '소피아'의 지명이었다. '세르디카'는 기원전 7세기경 '트라키아 세르디 부족'이 처음으로 정착하면서 탄생하여, 14세기 이후 그리스어로 '지혜'를 의미하는 '소피아'로 불리게 되었다. 3세기경 로마인들에 의해 '세르디카' 지역에 강력한 성벽들이 건립, 현재는 '세르디카'의 동문에 해당하는 성벽과, 2 개의 탑이 보존되어 있다. 이것은 지하도를 건너가면서 구경할 수 있으며, 지하도 한켠에는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성곽의 모형과 발굴작업의 기록사진들이 전시되어있다. 현재는 '세르디마'의 많은 부분들이, 현대건물들 아래에 남아있다. 지상에는 현대식 건물, 지하에는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소피아'는 '불가리아'의 수도로, 세계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로마시대에는 '세르디카'라 불렸고, 중세에는 '스레데츠'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도시는 다양한 문화와 역사적 유산을 지니고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문명과 교류하며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소피아(Sofia)'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지혜'를 의미하는 'Sophia'에서 유래되었다. 저기 뾰죽한 것은 '성 소피아 여신상(The Statue of Sveta Sofia)'이다. 높이 20m, 2000년에 건립되었다. 공산주의 종식과 독립을 기념하여 '레닌 동상'이 있던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왕관'은 '힘', '화관'은 '명성', '올빼미'는 '지혜'를 상징한다고 한다. 도시엔 '트램'이 서로 바쁘게 교차해 달린다.
'소피아'의 중심 '네델리아 광장'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아름다운 벽돌로 꾸며진 '네델리아 교회' 앞 광장은 '소피아'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광장이 위치한 도심에는 대통령 집무실과 구 공산당 본부, 그리고 호텔과 백화점 등이 위치하고 있다.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으로, 광장 중심에는 지혜의 여'인 '소피아 여신상'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과거 공산주의 시절에는 '레닌 동상'이 있는 '레닌 광장'으로 불리었으나, 민주화 이후 '레닌'의 동상이 있던 자리에 '소피아 여신상'이 서게 되었으며, 그 이름도 '네델리아 광장'으로 바뀌었다. 푸르른 나무와 화려한 '네델리아 교회'를 바라보며, '불가리아' 사람들과 함께 거닐어 본다. '구 공산당 본부 앞 광장에서 바라보면 지붕만 나와 있는, '성 페트카 지하교회', '오스만튀르크'재국시대 당시인 14세기에 건축되었으며, '소피아'에 남아있는 중세교회 중 하나이다. '오스만튀르크' 지배 당시 튀르크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지하에 지었다. 외부는 타일에 덮여 있어 볼품이 업으나, 내부는 매우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현재는 '중앙백화점' 앞 지하도 안에 있으며 노점상과 카페들로 둘러싸여 있다. 고대 로마사원을 기초로 하여 건축되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대성당(교회)'은 '소피아' 시내 중심에 위치한 '불가리아 정교회'에 속하는 대성당이다. 국립 상징물 중의 하나로, 고요한 아름다움과 역사적 중요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성당의 이름은 '러시아'의 국민영웅 '알렉산더 네프스키'에서 명명되었다. 이 대성당은 '불가리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러시아'와 '불가리아'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
오후 2시10분경 '벨리코 투르노보'에 도착했다. 과거에는 '투르노보'라고 불렀지만, 1965년 도시의 역사적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 '큰', '위대한'이라는 뜻을 가진, '불가리아 형용사'인 '벨리코'를 붙이면서 지금과 같은 이름이 되었다. '불가리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 가운데 한곳이며, 기원전 3000년부터 사람이 살았다.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불가리아'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가 들어서면서 급속도로 발전했고,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가 된 이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지로 여겨졌다. 14세기 '비잔틴제국'이 쇠퇴하면서부터 발칸반도와 슬라브계 정교회의 중심지로 변화, 한때는 '제3의 로마'라고 부르기도 했다. 200년 동안 마을의 번영과 발전이 지속되었지만, 1393년 '오스만제국'이 3개원 동안, 포위를 뚫고 요새를 함락하면서 마을의 발전도 멈추게 된다. 또한 '오스만 제국'이 '불가리아 제국'을 정복하면서, '불가리아'에 있던 마을과 교회, 수도원 대부분이 화재로 인해 사라졌다. 1598년과 1686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무장봉기'(중세시대에는 불가리아어로 '투르노브그라드',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터키어로 '투르노바'라고 불렀음)가 일어났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만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19세기에 일어난 '불가리아' 민족부흥운동은, '불가리아' 민족의식의 고취와 강력한 저항운동으로 이어졌다. 불가리아인의 '독립국가 건설'과 '불가리아 정교회' 재건에 대한 열망은, 1876년 봉기로 이어졌으며, 특히 1876년 4월26일에 일어난 '4월 봉기'는 '오스만 제국' 의 '불가리아' 지배종식과, '러시아 튀르크 전쟁으로 이어졌다. 1877년 7월7일 러시아 장군 '요시프 블라디미르비치 구르코'가 '투르노보'를 해방시켰고, 480 년 동안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불가리아' 지배도 막을 내리게 된다. 1878년 '베를린조약'에 따라 승인된 '불가리아 공화국'은, '다뉴브 강'과 '발칸산맥'에 걸쳐있는 '투르노보'를 수도로 삼았다. 1879년 4월17일 최초로 '불가리아 의회'가 소집되었으며, '불가리아' 최초의 헌법을 제정했다. 수도를 '소피아'로 이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소피아'는 지금의 수도가 되었다. 1908년 10월5일 '페르디난드 1세'가 이곳에서 '불가리아'의 완전 독립을 선언했다. '불가리아 왕국' 군주의 장남이자 왕위 계승자의 칭호가 '투르노보 공'이었다.
'벨리코 투르노보' 언덕 위에 위치한 이 '차르베츠 요새'는 13세기 '불가리아 왕국'의 궁전을 방어하기 위해 중세시대에 만든 성곽의 요새다. 성모승천교회도 있다. 실제로 '불가리아' 국기
는 '러시아' 국기에서 '파란색'을 '초록색'으로 바꾼 것이라 한다. '불가리아'가 '오스만 제국'에게서 독랍할 때,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 논리에 따라, '불가리아'를 도와줬기 때문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차르베츠 성'에서 내려다본 '벨리코 투르노보' 전경이다. '안트라강' 상류에 있는 옛도시 '벨리코 투르노보'는 제2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1185~1396)였으며, '아센 2세' 시대에는 비잔틴을 제압하고 슬라브 문화의 중심지로 '불가리아의 아테네'라 불리던 곳이다.
이 분은 '차르베츠 성' 맨 위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내원이다. 엘리베이터 안쪽 벽면엔 '벨리코 투르노보' 전경사진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마치 전망대의 유리 보호막 안쪽에서 찍은 것 같은 사진이다. 저 흰색 금이 대형사진을 연결한 흔적이다. 우리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South Korea', 그는 즉시 'Oh Brother Country'라고 응답하여 함께 인사하며 서로 환하게 웃었다.
성을 내려오는 길이다. 나는 'Rest Room'을 두리번거렸으나, 찾지를 못하고, 저 아래 평지 도로에 가서도 '공용'을 끝내 찾지를 못했는데, 팀장님이 가르쳐준 곳으로 가 보니, 큰 오뚜기 모양의 임시 설치소였다. 차량 통행이 좀 있는 건널목을 건너, 좁은 계단길 아리로 내려가야했다. 우리나라 참 잘 살고 행복한 나라다. 고속도로든 일반도로든, 고객들을 위한 배려는 그만이다. 거기에 무료 이용, 또 깨끗하기는 세계에 비교할 데가 없을 것이다. '한국은 처음이지?'에 출연하는 외국인들이, 반찬 무료추가, 식당의 물 무료, 깨끗한 화장실에 감탄하고 놀라는 표정을 자주 보았다. 독도는 우리 땅,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불가리아'에서 여행 선물을 살 때 참 좋은 건 역시나 저렴한 가격이다. 좋은 품질에 아주아주 낮은 가격^o^ '불가리아'는 장미로 유명한 것 알죠?^^요거트도 유명하지만, 불가리아의 장미축제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여기 오기 전부터 여행 안내책에서 읽은 '기초 화장품은 불가리아에서'이다. 각종 천연 장미제품을 판매하고 있고, 가격도 싼 편이다. '장미비누', 특히 외국인들이 더 애용하고 있다고.♣♧ 16시경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로, 약 2 시간을 이동한다.
2024년 9월05일(목),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 각광받는 도시 '시나이아', 왕가의 여름별궁 '펠레슈 성', 중세시대의 모습이 잘 보존된 '시기쇼아라'
호텔 아침식사 6시30분부터, 8시40분 '시나이아'로 출발했다. 약 2 시간 이동, '시나이아' 시내에 10시50분 도착했다. '루마니아' 최고의 산악 휴양도시 '시나이아', 천혜의 자연환경과 아름다운 건축물로 걱광 받는 도시다. 이곳에는 '루마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보 1호의, '카롤 1세'가 지은 여름궁전인 '펠레쉬 성'이 있다. 약 40여 년 동안 지어졌다고 하고, 유럽의 성들 중 가장 최근에 지은 성이다. 130여 개의 방, 그 중 30여 개의 방만이 개방된다.
냉전시대에 공산당을 털이 숭숭 난 빨갛고 무시무시한 눈을 가진, 도깨비 같은 괴물로 굥ㅍㄱ 받은 우리 세대, 동유럽 국가들은 모두 가난한 공산독재 국가들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고등학생을 지나서까지도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루마니아'는 '로마인의 땅'이라는 뜻이다.슬라브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가 많은 발칸과 동유럽에서, '루마니아'는 독특하게 라틴계 민족국가다.
'펠레쉬 성'은 '루마니아'의 국보1호로, 초대 왕인 ' 카롤 1세'가, '시나이아'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 이곳에 지은, 왕가의 '여름별궁'이다. 목재로 장식한 외관 일부는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주며, 은은한 빛깔의 대리석 벽과 우아한 탑들, 날렵한 지붕이 숲과 잘 어우러져 동화 속의 장면을 맞이한 듯하다. 빛나는 상들리에와 스테인드글라스, 정교한 조각 등으로 사치스러울 만큼 꾸며진 성 내부 170여 개의 방, 유럽의 회화작품 2천여 점과, 4천여 점의 무기를 비롯해 골동품, 도자기, 직물, 가구 등, '카롤1세'가 전세계에서 수집한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옛 건물을 그대로 식당으로 쓰고 있는 것 같은 점심 식사했던 곳이다. '루마니아'에도 옛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두 번이나 큰 전생을 치른 유럽에 오랜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은, 뵥돌이나 단단한 돌을 건물 재료로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루마니아' 인구의 80% 이상이 루마니아 정교회 신자다. 마을마다 있는 정교회 성당들은, 외벽에도 프레스코화를 그리고, 기둥은 예쁘게 조각하고, 처마 밑에는 회벽을 둘러 조각을 하거나 예쁜 그림을 그려 넣는다. 건물마다 기둥 하나하나 처마 하나하나 정성이 가득해서 참 예쁘다. 100년 이상된 낡은 집이어도 깨끗하게 손보고 관리하며 마당 구석구석 예쁘게 꾸민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함께 볼 수 있게, 작은 인형이나 꽃들을 창가와 집 앞에 내놓는다. 제주특별자치도 올레오름길에서, 마을 안길을 걸을 때에도 그랬다. 발걸음이 기분좋았다. 오랜 역사는 마을의 인심도 그윽하게 하나보다. 13시40분 버스승차, '시기쇼아라'까지 약 3시간을 달린다.
'루마니아'의 '시기쇼아라'는 소설 '드라큘라'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블라드 3세'가 태어난 곳이다. 그 때문에 '블라드 3세' 및 '드라큘라'와 관련된 명소가 맣다. '블라드', '체페슈', 동상부터, 소설 속으로 들어온 듯한 중세 공동묘지까지, '드라큘라 테마여행코스'는 즐비했다. '블라드 3세'는 '루마니아' 공국인 '왈라키아'의 공작으로, 15세기 '왈라키아'를 지도했다. 흔히 '용의 아들'이라는 뜻인 '블라드 드라큘라', 혹은 '블라드 체페슈'라고 불리는데, '체페슈'는 '꿰뚫는 자'라는 의미로, 죄인이나 전쟁포로를, 잔혹한 처형방버을 고수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이로 인해 그후 '브램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에서 '흡혈귀 드라큘라'의 모티브가 되었다. '블라드 드라큘라', '블라드 체페슈', '블라드 3세' 등 다양하게 불리지만, 해당 글에는 가장 많이 알려진 '블라드 체페슈'라고 등장한다. 요새 안 구시가지 한복판에 설치된 이 동상은 '블라드 3세'의 얼굴 형상을 깎아둔 커다란 동상으로, '시기쇼아라' 관광객들의 인증샷 명소다. 특히 전신이 아닌, 머리카락을 포함한 얼굴을 투박하게 묘사해, 조금은 무섭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동상이 올려진 기둥에는, '블라드 체페슈(VLAD TEPES)'라는 이름,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1431~1476) '왈라키아 통치시기((1448~1476)를 포함한 간략한 정보가 적혀있다. 특히 이 동상이 위치한 골목은 '시기쇼아라'의 명소 '시계탑'과 '수도원 교회', '시기쇼아라 시청'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졸다.
'시기쇼아라 역사지구(Historic Center Sighisoara)'는 199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즈넉한 동네이다. ‘블라드 3세’의 생가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거리에는 다양한 '드라큘라 백작'의 기념품을 구매할 수 있고, 돌로 이루어진 거리들과 함께 '시계탑'의 야경이 예쁜 곳이다. 색색별로 예쁜 집들이, 작은 창과 꽃들로 꾸며져 있다. 좁은 골목골목 다니면서 집 구경하기. 그외 '루마니아' 전통 옷과 각종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가게들도 많고, 골목골목 카페와 성당, 시청을 구경할 수 있다. 동네 자체가 북적이지 않아서 조용히 산책하고 다니기 좋다. 도시 바닥은 매끄럽지 않다. 성 안쪽은 대부분 돌멩이로 되어 있고, 숙소 또한 은은한 새깔로 벽을 구성했다.
골목 어귀에는 기사복장의 모형도 서 있다. 여기저기 걸어다니며 보는 재미, 듣는 재미를 누렸다.'루마니아'는 '다뉴브강'과 '카르파티아 산맥',그리고 흑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깨끗한 자연과 문화유산을 두루 간직한 나라다. 도시 구석구석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중세의 마을과 현대적인 도시들이 공존한다. 농업과 중세적 생활방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시골마을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다양한 생물학적 종들을 갖춘 지역으로 인정받는 다뉴브 델타, 그리고 건축·음악·공예 등 전통문화를 통해 오랜 세월 유지되어 온 루마니아인들의 예술혼과 문화 역량 등으로 루마니아는 충분히 만족감을 주는 여행지임에 틀림없다.
루마니아 사람들의 주식은 옥수수죽인 ‘마마리가’다. 또 다진 돼지고기를 포도잎으로 싼 ‘사르말레’가 전통 음식이다. 관광객 상대의 식당에서 마마리가, 사르말레, 옥수수 수프, 샐러드, 오렌지 주스 등을 먹으면 약 4달러 정도 나온다.
그릇은 우리의 삶을 영화롭게 한다. 그릇이 생활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릇은 음식을 담은 역할을 한다. 맛있게 요리한 음식을 그릇에 담아서 식탁에 내놓는다. 아무리 좋은 맛깔스러운 음식이라도 그릇에 담아내지 못한다면 그 음식은 보잘 것 없이 보일 것이다. 음식이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담아준 그릇이 있기에 음식이 맛스러워 보이고 더 멋스러워 보인다. ‘그릇(Bowl)이란‘음식이나 물건 따위를 담는 기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릇의 종류로는‘종지.쟁첩.옴파리.보시기.접시.합(盒).항아리’등이 있다. 보시기에는 김칫보와 조칫보가 있다. 김칫보는 김치를 담고, 조칫보에는 찌개를 담는다. 종지는 가장 작은 그릇으로서 각종 조미료를 담는다. 그 내용물에 따라 간장종지, 고추장종지, 젓갈종지 등이 있다.
산골짜기 계곡에서 멱감고 가재 잡으며 여름날을 보낸 소년기는 하얀 물소리와 초록빛 풀벌레 소리만 들렸다. 산자락엔 산딸기와 보리뚝이 영글고 강아지풀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물살에 걸며 놀았다. 가끔은 등성이 참나무 그늘에 앉아 '황순원'님의 '소나기'를 읽었다.
2024년 9월06일(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시기쇼아라' 역사지구, 여행의 시작과 끝 '헤르만 오베르트' 광장, 소설 '드라큘라'의 무대 '브란' 성의 '고색창연'
아침 8시40분 '브란성'으로 출발했다. '드라큘라 성' 탐방 뒤 매표소 입구에서 식당으로 이동(11시45분~12시까지), 13시 30붖경 '부카레스트'로 출발한다. '시기쇼아라'의 숙소다. 발칸반도의 건물들 외벽은 대체로 이런 분위기다.
찻간에서 바라본 양들과 목동이다
루마니아 여행에는 드라큘라의 흔적을 밟는 일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만큼이나, 루마니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름이 바로 '드라큘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브란 성'은 1897년 아일랜드 작가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의 모델이 되었던 '블라드 체페슈 3세'가 머물렀던 곳이다. '체페슈'는 루마니아어로 '꼬챙이'란 뜻인다.
'브란 성'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든 평면모형이다. 영화 속에서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을 한 '드라큘라'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상상만으로도 소름 돋게 하는 인물이었는데, 무시무시한 그의 거처이니 집 곳곳에 얼마나 짙은 한기가 서려있을지 진작부터 기대가 차올랐다.
그러나, 언덕을 따라 올라간 성의 모습은 오슬오슬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음침하거나 무서운 분위기 보다는, 동화 속의 성처럼 낭만적이었다. 성의 난간에서 왕자가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며, 반대편 난간에 서 있는 공주에게 다가가는 장면이 상상될 만큼 로맨틱한 장소였다. 영화와는 다른, 나의 총평이다.
누가 뭐래도 '브라쇼브' 최고의 명소는 인근에 위치한 '브란 성'이다. 드라큘라 성으로 알려진 '브란 성' 하나만으로도 여행객을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1212년 요새로 건설된 성은 1920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개조해 여름 궁전으로 사용했다. '부카레스크'로 급히 양하는 버스 차창으로 내다본 루마니아의 자연풍경이다. '드라큘라 성'을 나와 맞이하는 '평화로움', 짧은 일정에 너무 많은 곳을 이동하느라 긴 시간을 쏟기도 했다. 내 기억에, 오래 남은 여행은 욕심을 버리고, 속도를 늦췄을 때 찾아오곤 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곳의 음식과 풍물, 특이한 체험과 감동 등도 좋지만, 나는 내 여행 '동반자'와, 낯선 길을 누비고 걸으며, 과거와 현재, 도란도란, 두런두런,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 것이 좋다.♥♬?
'루마니아'의 수도 '부크레스트'는 '행복이 샘솟는 곳', 또는 '기쁨이 넘치는 곳'이라는 뜻이다. 시내 곳곳에 아주 커다란 공원이 많다. 사람들이 가족이나 연인들과 함께 공원에서 하루를 즐기는 모습은 도시 이름 그대로다. 또한 '부크레스트'는 '동쪽의 파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200~300년 된 건물들을 여러 쓰임으로 활용하고 있는 게 참 좋아 보였다.
여행 중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들은, 짧지만 강렬한 만남을 나눈 이들이다. 이들은 단 한 번의 대화나 스치는 순간을 통해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예를 들어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행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삶의 새로은 시각을 열어주기도 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이야기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마음 속에 간직된 이야기로 자리잡는다.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은 이렇게 짧은 순간에도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들과의 만남은 마치 운명처럼 우리의 여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숫자와 글씨들, 맞는 숫자에 정해진 시간까지 도착하기, 항공권, 좌석배정, 기내식, 줄을 잘 서기, 여기 다음은 어디로 가고, 그 시간동안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할지 등, 그렇기에 좀 여유와 함께 생각을 정리하고 차분한 느낌을 느끼고 싶어서, 일부러 비행기 시간보다 굉장히 일찍 공항에 도착하곤 한다. 게이트 앞에 앉아서 비로소 아무것도 해야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야, 여행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게 참 아이러니다. 건축물은 가끔은 그저 바라만 보아도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특히 공항 건물들은 천장이 높고 많은 승객들의 이동을 위해 널찍널찍하게 지어진 경우가 많은데, 이런 건축물을 구경하는 것만 해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2024년 9월07일(토), 문화유산, 삶과 투쟁의 역사, 그 속의 주인공이 된 시간, 루블랴나, 포스토이나, 자다르, 크르카국립공원, 스플리트, 모스타르, 메주고리예, 두브로브니크, 헤르체그노비, 코토르, 쉬코드라, 티라나, 오흐리드, 스코페, 베오그라드, 소피아, 벨리코투르노보, 부카레스트, 시나이아, 시기쇼아라, 브란, 부카레스트, '침 좋은 여행', '뜻깊은' 여행이었다
탑승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 절차를 통해 소지품이나 신변을 확인받는다. 엄격한 검색대의 눈앞에서는 괜시리 착한 표정을 짓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을 무사히 통과해 다른 땅에 도착했을 때, 우리들은 해낸 듯한 성취감에 젖었다.?
산책을 나선다. 내가 거닐 곳은 사유와 발걸음이 서로 만나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걷기'와 '생각하기'는 닮았다. 몸만 사용해서도 안 되고 정신만 오롯하다고 가능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둘 다 목표가 있으며, 노력을 필요로 한다. 중단의 유혹을 이기고 나면 성취감을 느끼고 성숙을 경험하게 되는 것도 똑같다. "몸과 정신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다. 아이가 걷기를 배우는 시기와 언어를 습득하는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인간은 발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첫 철학 스승은 우리 발이다.” (루소, <에밀>)
어느 나라의 공항이든 그 안에서는, 개성있는 모습과 이야기가 오고가는 매력이 있다. 나를 비롯 옆좌석의 여행자조차도 지나치게 투명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더 재미있다.
처음과 끝의 감정과 입맛은 더 소중하고 강렬하다. 비행기가 이륙하기전에 딱딱한 말투로, 안전벨트와 비상시 행동요령을 알려줄 때면 묘하게 긴장을 맛본다.
나 자신도 여행 초기에는 낯선 환경이 주는, 불편함과 부조리에 실망하여 여행 자체를 후회한 적도 있었다. 자기방어의 움츠림이, 나와 세상을 분리시켰다. 그러다가 서서히 현지 음악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 여행 동반자에게서는 물론, ‘사리’ 입은 여인들의 모습에 감탄하고, 갠지스강 너머로 떠오르는 아침 해에 가슴을 열게 되었다. 심지어 한밤중 기차역의 아수라장 앞에서도 전율하고 경탄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힌두어를 모르는 나는 손 씻으러 감히 여자 화장실로 향했던 모양이다. 어리석게도 ‘여인 천하’란 걸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시종일관 유아독존, 이방인에 쏠린 남녀노소 여인들, 내가 볼일을 마칠 때까지 숨죽여 기다려주었다는 걸, 밖으로 나와 휴게실 저 반대편으로 무수히 드나드는 남자들을 발견하고서야, 부끄러움과 미안함의 겨를도 없이 천둥소리에 놀라듯 소스라쳤다. 모두 왜 아무 말도 안 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그 아량과 배려에 여전히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때의 감동이야말로 나를 점점 여행자로 만들어갔을 것이다. 예찬하는 마음은 모든 풀뿌리를 약초로 만든다.
‘…이 행성에서 여행을 마치고 떠날 때 어떤 말을 할 것인가? 혹은 이 지구별에 여행 오려고 준비하는 새로운 영혼에게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 인간 세계에서 조심해야 할, 긴 목록을 암기시키면서 격세지감의 자세를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지구에는 예찬할 것이 너무 많다고, 언제나 예찬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 주겠는가?…(류시화의 수필 중에서)’